03화 3화 — 첫 전장
3화 — 첫 전장 오후 1시 41분. 이성은 화상회의 링크를 받았다. Zoom이었다. 클라이언트 측에서 보낸 거였다. 30분 뒤에 들어오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15분 만에 답장이 왔고, 메시지 끝에 "지금 바로 가능하실까요?"가 붙어 있었다. 대표가 답답한 거였다. 이언이 책상 옆에 서서 말했다. "적이 먼저 자세를 흐트러뜨렸구나."
3화 — 첫 전장
오후 1시 41분.
이성은 화상회의 링크를 받았다. Zoom이었다. 클라이언트 측에서 보낸 거였다. 30분 뒤에 들어오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15분 만에 답장이 왔고, 메시지 끝에 "지금 바로 가능하실까요?"가 붙어 있었다.
대표가 답답한 거였다.
이언이 책상 옆에 서서 말했다.
"적이 먼저 자세를 흐트러뜨렸구나."
"…그게 무슨 뜻이에요."
"먼저 약속한 시간을 무너뜨리는 자는, 이미 자기 진을 잃었다는 뜻이다. 마음이 급한 자는 — 시간을 못 지킨다."
이성은 그 말을 들으면서 카메라 위치를 살짝 고쳤다. 노트북 카메라 각도가 살짝 위로 가도록. 셔츠는 그래도 단추 있는 걸로 갈아입었다. 셔츠를 갈아입는 동안 이언이 등을 돌려줬다. 천 년 전 장군한테도 예의는 있는 거였다.
"…장군님."
"그래."
"…보이지는 않으시는 거 맞죠? 저쪽한테는."
"보일 리가 있겠느냐."
"…네."
"왜 묻느냐."
"…아니, 만약에 보이면 좀 곤란해서요."
이언이 잠깐 그 말을 곱씹었다.
"…내가 너에게만 보인다."
"네."
"그렇다면 — 다행이로구나."
"…네."
이성은 마우스 위에 손을 올렸다. 클릭 한 번 하면 통화가 시작될 거였다. 클릭 직전에, 손이 또 떨릴 뻔했다. 어제처럼.
이언이 그걸 봤다.
"…후손."
"네."
"한 가지만 말하겠다."
이성은 마우스에서 손을 떼고 이언을 봤다. 이언은 부동자세 그대로였다. 갑옷, 망토, 칼. 욕실 거울에 안 비치는 사람. 책상 옆에 서서,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적은 너의 코드를 보지 않는다."
"네?"
"적은 너의 코드를 보지 않는다. 적은 — 너의 두려움부터 본다."
이언의 말이 짧았다.
"두려움을 보이면 적은 자기 마음을 닫는다. 닫은 마음 위에 무엇을 쌓아도 무너진다. 그러니 — 두려움부터 지워라. 그 다음에 말해라."
이성은 그 말을 한 번 더 머릿속에서 굴렸다.
두려움부터 지운다.
이성은 자기가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았다. 클라이언트가 화내는 거. 화내고 외주비를 깎는 거. 외주비가 깎이면 이번 달 월세가 빠듯해지는 거. 그래서 자꾸 굽실대게 되는 거. 굽실대다가 변경 요청을 다 받게 되는 거. 받다 보면 새벽 3시에 `rm -rf` 직전까지 가는 거.
거기까지가 어제까지의 흐름이었다.
이성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마우스를 클릭했다.
화면이 두 칸으로 나뉘었다.
왼쪽 칸에 — 클라이언트 팀장이 있었다. 30대 후반쯤. 안경. 살짝 지친 얼굴. 어제 본 그 얼굴 그대로였다.
오른쪽 칸에 — 처음 보는 얼굴이 있었다. 50대 초반. 셔츠. 회의실 같은 배경. 이 사람이 대표였다.
"이성 대표님, 안녕하세요. 김 대표입니다."
대표의 첫 마디는 빠르고 짧았다. 인사할 시간도 안 줬다. 이미 본론에 들어갈 자세였다.
이성은 — 평소 같았으면 — "아 네 안녕하세요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라고 한 줄에 다 말했을 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안 했다.
이언의 말이 머릿속에 있었다.
> 두려움부터 지워라. 그 다음에 말해라.
이성은 카메라를 똑바로 봤다.
"네, 대표님. 안녕하세요."
그게 다였다.
대표가 잠깐 멈칫했다. 멈칫한 게 화면 너머로도 보였다. 0.5초쯤. 이성이 그 다음 말을 안 하니까, 대표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다음 말을 해야 했다.
"…네. 일단 협력사 건이요. 제가 이걸 왜 자꾸 말씀드리냐면—"
"잠시만요, 대표님."
이성이 끊었다.
본인이 끊고 본인이 더 놀랐다. 클라이언트의 말을 끊은 게 — 이성의 외주 인생 7년 만에 — 처음이었다.
옆에서 이언이 살짝 끄덕이는 게 시야 끝에 잡혔다.
"…네, 말씀하세요."
대표가 약간 당황한 톤으로 답했다. 당황한 톤이었지만 — 화는 안 났다. 오히려 — 약간 흥미가 생긴 톤이었다.
이성은 천천히 말했다. 천천히 말하는 게 평소엔 잘 안 되는데, 오늘은 됐다. 옆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사람 때문일 수도 있었다.
"협력사 건은 — 시스템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대표의 눈이 약간 좁아졌다.
"…어떻게 그렇게 보시죠?"
"기존에 의뢰해주신 다섯 번의 변경 요청이 있어요. 제가 다시 보니까 — 다섯 번 중 세 번이 사실은 '협력사가 영업 데이터를 어떻게 안 빼가게 할까'에 대한 거였습니다."
이성이 화면 공유를 켰다. 어제 새벽에 정리해뒀던 — 정확히는 어제 새벽에 정리하다가 `rm -rf` 직전까지 갔던 — 그 변경 요청 로그였다. 다섯 줄. 일자별로.
"이거 보시면, 1번 권한 분리, 3번 협력사 분리 로그인, 5번 협력사 시스템 통합 — 이거 사실 다 같은 얘기예요. 협력사한테 시스템은 주고 싶은데, 영업 정보는 빼가지 못하게 하고 싶다, 이거잖아요."
대표가 잠깐 가만히 있었다.
팀장이 옆 칸에서 자기 펜을 만지작거리는 게 보였다.
"…맞습니다."
대표가 결국 그렇게 답했다.
"맞아요. 그게 사실 제일 큰 고민이었어요."
"네."
"…그걸 어떻게 아셨죠?"
이성은 잠깐 옆을 봤다. 이언이 거기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보지 않는 척하면서, 사실은 화면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갑옷의 어깨가 살짝 — 펴진 것 같았다.
이성은 다시 카메라를 봤다.
"…변경 요청을 다섯 번 받으면, 그 다섯 번이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을 때가 있어요."
"…아."
"그 다섯 번 뒤에 진짜 원하시는 게 뭔지를 한 번 짚고 가는 게 — 저한테도 대표님한테도 빠를 것 같아서요."
대표가 한 번 끄덕였다. 천천히. 천 년 전 사람의 끄덕임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끄덕임이었다.
"…좋습니다."
"네."
"그래서, 어떻게 풀자고 제안하시는 건가요?"
이성은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여기였다. 여기서 한 번 더 가야 했다.
"두 가지로 나누고 싶습니다."
"두 가지요?"
"하나는 — 기존 CRM. 이거는 지금까지 진행한 거 그대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약속드린 일정 안에. 추가 비용 없이."
"네."
"두 번째는 — 협력사 권한 관리 시스템. 이건 별도 프로젝트로 보고 있어요. 기존 외주 범위가 아니라서요. 이거는 별도로 견적 드리겠습니다."
대표가 안경을 한 번 만졌다.
"…별도 견적이요."
"네."
"얼마쯤 보세요."
이성은 카메라를 똑바로 봤다.
"…칠백."
이언이 옆에서 살짝 — 아주 살짝 — 미간이 움직였다. 칠백이 천 년 전에는 어느 정도 금액인지 이언은 모를 거였다. 그래도 미간이 움직였다는 건 — 이성이 처음으로 가격을 부르는 톤이 — 어제까지의 톤과는 좀 달라서였을 거였다.
대표는 잠깐 가만히 있었다. 화면 너머로 다른 창을 한 번 봤다. 아마 계산기든 뭐든 켰을 거였다.
"…팀장님, 그쯤 가능하죠?"
"…네. 협력사 건은 어차피 따로 예산 잡으셨던 거잖아요."
"그렇긴 했죠."
대표가 다시 카메라를 봤다.
"이성 대표님."
"네."
"좋습니다. 그렇게 가시죠. 기존 건은 약속대로 끝내주시고, 협력사 건은 다음 주에 별도 미팅 잡아서 본격적으로 시작합시다. 견적서는 내일까지 부탁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오늘 통화 — 좋네요. 진작 이렇게 풀었어야 했는데."
대표가 그렇게 말하고 화면을 끄려다가, 한 번 더 멈췄다.
"근데 한 가지만요."
"네."
"…오늘 좀 다르시네요. 어제까지랑."
이성이 잠깐 말을 멈췄다.
"…어떻게요?"
"음… 뭐랄까. 좀 더 — 그래요. 좀 더 윗사람 같은 톤이에요."
이성은 답하지 않았다.
이언이 옆에서 — 처음으로 — 작게 웃었다. 그것도 아주 작게.
"…아닙니다. 좋은 통화였습니다, 대표님."
"네. 그럼 내일 견적서 기다리겠습니다."
화면이 꺼졌다.
오후 2시 03분.
이성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카메라를 봤던 자세 그대로 한 번 더 천장을 봤다.
"…미쳤다."
"무어라."
"…아니, 그게요. 저 7년 동안 외주 하면서, 한 번도 — 한 번도 — 가격을 먼저 그렇게 부른 적이 없거든요."
"왜 그러느냐."
"무서워서요."
"무엇이 무서웠느냐."
"…거절당하는 게요. 깎이는 게요. 일이 끊기는 게요."
이언이 잠깐 가만히 있었다.
"…그래. 그 마음은 안다."
"…네?"
"내가 살던 시절에도, 처음 칼을 쥔 자는 칼 끝이 떨렸다. 적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 적이 자기를 무서워하지 않을까 봐 무서웠던 것이다."
이성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게 다른 거예요?"
"다르다."
"…어떻게 다른데요."
"적이 무서운 자는 — 자기를 본다. 적이 자기를 무서워하지 않을까 봐 무서운 자는 — 적의 눈치를 본다. 적의 눈치를 보는 자는, 적이 원하는 모습이 된다."
이성은 그 말을 한참 곱씹었다.
천 년 전 장군이 — 자기가 7년간 외주를 하면서 못 깨달은 걸 — 한 줄로 설명하고 있었다.
"…장군님."
"그래."
"…커피 한 잔 더 내릴게요."
"내가 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알아요. 그래도 한 잔 더 내릴게요."
이언이 잠깐 가만히 있었다. 그러더니, 부동자세를 살짝 풀었다. 갑옷이 작게 — 천 년 만에 처음으로 — 약간 가벼워 보였다.
"…그래라."
이성은 핸드밀을 다시 잡았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콩이 갈리는 동안, 이성은 노트북 화면을 한 번 더 봤다. 메일 알림이 떴다. 클라이언트 측에서 보낸 거였다.
> 견적서 부탁드립니다.
> 그리고 — 오늘 통화 진행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대표님이 통화 끝나고 한참 좋아하셨어요.
이성은 짧게 답장을 보냈다.
> 네. 내일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전송.
핸드밀의 손잡이가 다시 가벼워졌다.
오후 2시 09분이었고, 형광등은 여전히 켜져 있었고, 옆에는 — 갑옷을 입은 천 년 전 장군이 한 명, 부동자세로 서서, 콩 갈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