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화 1화 — 칼을 든 자 커밋을 모르고
새벽 3시 17분. 원룸의 형광등은 진작에 꺼져 있었다. 노트북 화면이 이성의 얼굴을 푸르게 비추고 있었다. 그 외엔 빛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었다. 책상 위에는 식어버린 컵라면 하나. 그 옆에 다 마신 박카스 두 병. 터미널 커서가 깜빡였다. $ rm -rf ./client_project/ 이성은 엔터키 위에 손가락을 올린 채, 한참을 멈춰 있었다. —
새벽 3시 17분.
원룸의 형광등은 진작에 꺼져 있었다. 노트북 화면이 이성의 얼굴을 푸르게 비추고 있었다. 그 외엔 빛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었다. 책상 위에는 식어버린 컵라면 하나. 그 옆에 다 마신 박카스 두 병.
터미널 커서가 깜빡였다.
이성은 엔터키 위에 손가락을 올린 채, 한참을 멈춰 있었다.
— 누를까.
이성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두 달짜리 외주였다. 클라이언트는 다섯 번째 요구사항 변경을 어제 또 들고 왔고, 코드는 이제 코드가 아니라 그냥 누적된 사과문 같았다. 다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짜는 게 빠를지도 몰랐다. 진짜.
새벽 3시의 1인 파운더는 그런 생각을 진지하게 한다.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때였다.
"베어라."
이성의 어깨가 움찔했다.
귀 옆이었다. 너무 가까웠다. 사람이 옆에 서서 말한 거리였다. 이성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거기 사람이 서 있었다.
원룸에. 잠긴 문 안쪽에. 새벽 3시 17분에.
이성은 노트북을 닫지도 않고 일어섰다. 일어서다가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의자가 넘어가는 소리에 본인이 더 놀라서 한 발 더 물러섰고, 등이 벽에 부딪혔다. 등이 부딪힌 충격으로 한 번 더 놀랐다.
"누, 누구세요."
목소리가 안 나왔다. 다시 한 번.
"누구세요!"
남자는 답하지 않았다.
키가 컸다. 이성보다 분명히 한 뼘은 더 컸다. 이성이 179였으니, 그러면 저 사람은 190 가까이 된다는 얘기였다. 어깨가 넓었고, 그 어깨 위에 뭔가가 — 갑옷이? — 얹혀 있었다. 검은 가죽과 쇠가 섞인 무언가. 등 뒤로는 망토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고, 허리에는 칼이 있었다.
진짜 칼이.
코스프레가 아니었다. 코스프레는 저렇게 무겁게 안 떨어진다. 저건 진짜 쇠였다.
남자는 이성을 보지 않고,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었다.
"…저거냐."
"네?"
"저것이 적이냐."
남자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가 거기 깜빡이고 있었다.
이성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가 다시 벌렸다.
"…아니, 저기요, 일단 누구신지부터—"
"베어라."
"네?"
"네가 그것을 베려 하지 않았느냐. 망설이지 마라."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발소리가 — 안 났다. 갑옷을 입은 사람이 한 걸음 옮기면 분명히 무슨 소리가 나야 하는데, 아무 소리도 안 났다. 이성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 사람, 바닥을 안 누르고 있다.
"…형님."
이성은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불렀다. 왜 형님이라고 불렀는지는 모르겠다. 사극을 너무 본 탓일지도 몰랐다.
"형님, 혹시…"
"이언(李彦)이다."
"네?"
"내 이름이 이언이다. 신무위대장군 이언. 너는 누구냐."
이성은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던 것 같았다. 어디서였더라. 친가 큰집 마루에 걸려 있던 족보 액자. 아버지가 술 한 잔 들어가면 꼭 한 번씩 꺼내던 이야기. 시조 이언 — 고려 광종 때 어쩌고 — 대장군 어쩌고 —
"…이언."
"그렇다."
"신무위… 대장군."
"그렇다."
"…저희 시조."
남자의 눈썹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네가 어찌 그 이름을 아느냐."
이성은 벽에 등을 붙인 채,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머리로 들어오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일단 몸이 항복한 거였다.
"…저, 32대손인데요."
"무어라."
"32대손이요. 이성. 성스러울 성."
남자는 — 이언은 —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무릎을 굽혀 이성과 눈높이를 맞췄다. 가까이서 보니 눈빛이 진짜였다. 코스프레로는 못 만드는 눈빛이었다. 사람을 베어본 적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
"…32대."
"네."
"천 년이로구나."
"…그쯤 됩니다."
이언은 다시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천장을 한 번 봤고, 형광등을 한 번 봤고, 닫혀 있는 창문을 한 번 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트북 화면을 봤다.
"이 마(魔)검은 무엇이냐."
"…노트북이요."
"노."
"노트북."
"노 트 북."
"네."
"…그래. 그래서, 저것은 적이냐 아니냐."
이언이 다시 화면을 가리켰다. 이성은 그제야 자기가 좀 전에 뭘 누르려 했는지 떠올렸다.
. 두 달짜리 외주 프로젝트. 백업 따로 안 해둠. 깃 푸시 마지막으로 한 게 — 사흘 전이었나.
"…적은 아니에요."
"적이 아닌데 어찌 베려 하느냐."
"그게, 베고 싶긴 한데, 베면 안 되거든요."
"베고 싶은데 베면 안 된다."
"네."
"그게 무슨 말이냐."
이성은 천천히 일어섰다. 다리는 아직 떨렸지만, 의외로 머리는 한 가지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일단 — 일단 이 새벽 3시 17분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건 나중에 하고 — 저 명령어를 어떻게 해야 할지부터.
"형님."
"형님이라 하지 마라. 시조에게 형님이 무어냐."
"…할아버지."
"그것도 아니다."
"…장군님."
"그래."
"장군님, 일단 저거 누르면 두 달이 날아갑니다."
"두 달."
"네. 두 달간 만든 게 다 사라져요. 그리고 사흘 전 거 빼고는 백업이 없어요."
이언이 인상을 썼다. 이언은 인상을 쓸 때 미간이 깊이 패었다. 천 년 전 사람도 인상은 똑같이 쓰는구나, 라고 이성은 생뚱맞게 생각했다.
"백업은 무엇이냐."
"…나중에 설명드릴게요."
"음."
"일단 저거, 안 누를 거예요."
"왜 베지 않느냐. 베고 싶다 하지 않았느냐."
이성은 노트북 앞으로 돌아갔다. 의자를 세우고, 앉았다. 손이 아직 떨렸다. 그래도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 올렸다.
명령어를 지웠다. 백스페이스 한 번 한 번이 묘하게 길게 느껴졌다.
대신 다른 걸 쳤다.
엔터.
엔터.
엔터.
화면에 결과가 올라왔다. 푸시 성공. 두 달이 — 일단은 — 살았다.
이성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천장을 한 번 봤다. 형광등이 꺼진 채로 거기 있었다. 새벽 3시 19분이었다.
"…살았다."
"…베지 않았구나."
"네."
"왜."
이성은 잠깐 생각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이 사람한테. 갑옷 입은 천 년 전 사람한테. 깃이 뭔지 모르고 백업이 뭔지 모르고 노트북도 노 트 북 이라고 한 자씩 끊어 읽는 사람한테.
이성은 결국 가장 짧게 말했다.
"…커밋부터요."
이언의 미간이 다시 패었다.
"커. 밋."
"네."
"그게 무엇이냐."
"음… 그러니까, 일단 지금까지 한 거를 — 어딘가에 박아두는 거예요. 박아두고 나서, 그 다음에 베는 거예요. 그래야 잘못 베도, 박아둔 거는 살아 있어요."
"…박아둔다."
"네."
"잘못 베어도, 박아둔 것은 살아 있다."
"네."
이언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 처음으로 — 이성에게서 시선을 떼고, 노트북 화면을 다시 봤다. 푸시 성공 메시지가 거기 그대로 있었다. 이언은 그것을 한참 봤다.
"…내가 살던 시절에는."
"네."
"한 번 베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네."
"베고 나서 후회해도,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무너진 성은 다시 서지 않았다."
이성은 입을 다물었다.
이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혼자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래. 너는 베지 않을 줄 아는구나."
"…그게 좋은 건지는 모르겠어요."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나중에 알게 되겠지."
이언은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원룸을 둘러봤다. 좁은 원룸이었다. 8평. 침대 하나, 책상 하나, 옷장 하나. 옷장 옆에 작은 욕실이 있었다. 욕실 문은 열려 있었다.
이언은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 발소리는 여전히 안 났다.
이성은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았다. 의자에 앉은 채로, 등받이에 기댄 채로, 그 뒷모습을 봤다. 망토가 등 뒤로 늘어져 있었고, 그 망토는 — 자세히 보니 — 살짝 비쳤다. 옷장이 망토 너머로 흐릿하게 보였다.
이성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언은 욕실 앞에 멈춰 섰다. 욕실 안에는 거울이 있었다. 세면대 위의 거울. 작은 거울이었다.
이언은 그 앞에 섰다.
오래.
이성은 자기 자리에서 그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보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일어서서 한 발짝 다가갔다. 두 발짝.
이언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한 번 떨렸다.
거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성이 가까이 가서 들여다봐도, 거울 안에는 욕실 타일과 세면대와 자기 어깨밖에 보이지 않았다. 갑옷도, 망토도, 칼도, 그 안에는 없었다.
이언은 자기 손을 들어올렸다. 거울 앞에. 손이 거기 있었다. 이성의 눈에는 보였다. 손마디가 굵고, 손등에 흉터가 두 개 있는 손이었다. 칼을 오래 잡은 손이었다.
그 손은 거울에 비치지 않았다.
이언은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장군님."
이성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이언은 돌아보지 않았다.
"…장군님."
"…그래."
"…괜찮으세요."
이언은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떼지 않은 채로, 천천히 말했다. 목소리가 — 좀 전과는 조금 달랐다. 좀 더 낮았고, 조금 더 멀었다.
"…내가 죽었구나."
이성은 답하지 못했다.
"내가 죽어서, 천 년이 지나, 너에게 왔구나."
이성은 여전히 답하지 못했다.
이언은 거울 앞에 서서, 자기가 비치지 않는 거울을 한참 더 봤다. 그러더니, 천천히 자기 손을 내렸다. 칼을 잡듯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손등의 흉터가 한 번 깊어졌다가 풀렸다.
"…베어둘 것을 그랬다."
"네?"
"천 년 전에. 베어둘 것을, 베어두지 못한 것이 있다."
이성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이언은 그제야 거울에서 돌아섰다. 이성을 봤다. 천 년 전 사람의 눈으로 32대손을 봤다.
"…후손."
"네."
"네가 베야 할 것이 있느냐."
이성은 잠깐 생각했다.
두 달치 외주. 다섯 번째 변경 요청. 백업 안 한 사흘. 식어버린 컵라면. 새벽 3시 19분. 통장 잔고. 부모님 전화. 안 받은 전화. 안 한 답장. 다 만들고 못 내놓은 사이드 프로젝트 세 개.
베야 할 게 많았다.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베야 할지 몰라서 새벽 3시에
를 누르려 했던 거였다.
이성은 노트북 화면을 봤다. 푸시 성공 메시지가 아직 거기 있었다.
"…있어요."
"많으냐."
"…네."
이언은 처음으로 — 아주 옅게 — 웃었다. 웃은 건지 아닌지도 모를 정도로 옅게.
"…잘 되었다."
"네?"
"내게 손이 없고, 네게는 손이 있다. 내게 칼이 없고, 네게는 — 저 마검이 있다."
이언이 노트북을 가리켰다.
"베자."
"…장군님."
"베자, 후손아."
"…네."
이성은 의자에 앉았다.
새벽 3시 21분이었다. 형광등은 여전히 꺼져 있었고, 노트북 화면만이 이성의 얼굴을 푸르게 비추고 있었고, 그 옆에는 — 거울에 비치지 않는 — 천 년 전 장군이 한 명 서 있었다.
이성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손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