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만드는 세상에서, 아무도 차별화하지 못한다
누구나 만드는 세상에서, 아무도 차별화하지 못한다 요즘 이런 문장을 자주 본다. “Manus로 홈페이지 뽑았다. 이제 누구나 만드는 세상이네.” 신난 얼굴이다. 그리고 나같은 지독한 사업가는, 그 얼굴이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 순간이 정확히, 한 조직이 학습을 멈추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도구가 표면에서 결과를 뱉어주면 사람은 거기서 만족한다. “됐다
누구나 만드는 세상에서, 아무도 차별화하지 못한다
요즘 이런 문장을 자주 본다. “Manus로 홈페이지 뽑았다. 이제 누구나 만드는 세상이네.” 신난 얼굴이다.
그리고 나같은 지독한 사업가는,
그 얼굴이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 순간이 정확히, 한 조직이 학습을 멈추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도구가 표면에서 결과를 뱉어주면 사람은 거기서 만족한다. “됐다”는 신호가 뜨는 순간, 그 밑을 팔 이유가 사라진다. 문제는 이게 개인의 게으름이 아니라 뇌의 기본 설정이라는 데 있다. 결과가 나오면 도파민이 나오고, 도파민이 나오면 멈춘다. 얕은 성공은 그 자체로마취제다. 너무 빨리 작동하는 도구일수록 더 강한 마취제다.
그래서 나는 요즘 회사들을 볼 때 매출이나 인력 규모를 먼저 보지 않는다. 얕은 성공이 학습을 멈추는 트리거로 작동하는가. 이 하나만 본다. 데모 하나 터지고 만족하는 팀, 표면 결과에 신나서 그 밑을 안 파는 팀. 이건 눈으로 확인되는 행동이지 추측이 아니다.
여기서 대부분이 놓치는 반전이 하나 있다. 누구나 만들 수 있다는 말은, 아무도 차별화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진입장벽이 0으로 수렴하면 그 레이어의 가치도 0으로 수렴한다. Manus로 만든 홈페이지가 넘쳐날수록 그 홈페이지 자체는 해자가 될 수 없다. 다음 사람도 5분이면 똑같이 뽑기 때문이다. “누구나 만드는 세상”에 신나 있는 사람은, 자기가 방금 세상에서 가장 복제하기 쉬운 자산을 만들었다는 걸 보지 못한 것이다.
역으로, 표면에서 멈추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깊이는 희소 자원이 된다. 남들이 표면에서 멈출 때 계속 파는 소수에게는 해자가 자동으로 넓어진다. 흔해지는 것과 비싸지는 것은 언제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표면에서 신나 하는 그 장면을 한 칸 뒤로 물러나서 보면, 똑같은 구조가 산업 전체에 겹겹이 쌓여 있는 게 보인다.
홈페이지를 뽑고 신나 하는 사람 뒤에서, 그 도구를 만든 회사가 웃는다. Manus는 유저가 홈페이지 하나 건졌다고 좋아하는 동안 그 유저들의 워크플로우와 데이터와 의존도를 쌓는다. 그런데 그 도구 회사 뒤에서는 또 다른 층이 웃고 있다. 앱을 만드는 사람은 API에 세금을 낸다. API 회사는 클라우드에 세금을 낸다. 클라우드는 실리콘에 세금을 낸다. 실리콘 아래에서는 그 칩을 찍어내는 파운드리가, 그 아래에서는 그 장비를 독점한 회사가, 다시 그 아래에서는 그 장비의 광학을 쥔 회사가 걷어간다. 파다 보면 사슬은 끝이 없다. 층마다 위층의 성공이 아래층의 매출로 흘러내린다.
이 그림을 처음 그리면 대개 이렇게 반응한다. “그럼 나는 맨 위에서 세금만 내는 호구네.” 하지만 그건 이 사슬의 규칙을 잘못 읽은 것이다.
이 사슬은 누가 위냐로 정해지지 않는다. 누가 대체 불가능하냐로 정해진다. 맨 아래에서 다 걷어가는 회사가 세금을 걷는 건 아래에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 아무도 그를 갈아치울 수 없어서다. 위치가 아니라 대체 가능성이 징수권을 준다. 앱 레이어가 세금을 위로 다 흘려보내는 것도 위에 있어서가 아니라 대체가 쉬워서다. 대체가 쉬운 층은 걷힌다. 대체가 어려운 층은 걷는다.
그러니 이 사슬을 보고 스스로에게 던질 질문은 “나는 어디쯤인가”가 아니다. “나는 어디서 대체 불가능한가.” 이것 하나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답을 하나 더 열어준다. 사슬 안에서 위로 올라가려 애쓰는 대신, 사슬을 빠져나가는 경로를 팔 수도 있다는 것. 중간 징수 층을 몇 개 건너뛰는 설계는 실제로 존재한다. 세금 라인 위에서 더 싸게 내려는 싸움과, 세금 라인 자체를 우회하는 싸움은 완전히 다른 게임이다.
여기까지는 남을 판별하는 칼이다. 그런데 이 칼의 진짜 위험은 남을 벨 때가 아니라, 내가 그 상태에 들어갔는데 못 알아챌 때 발동한다. “얕은 성공에서 멈추는 자가 진다”는 명제는, 내가 예외라고 믿는 순간부터 나를 겨눈다. 첫 결제, 좋은 지표, 진행 중인 특허 — 이런 작은 승리들이 쌓일 때 “나는 계속 파는 쪽”이라는 정체성 자체가 마취제가 될 수 있다. 남을 판별하는 칼은 대개 자기한테는 겨눠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관찰을 무기로 바꾸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리트머스를 밖으로만 쏘지 않고 안으로도 정기적으로 쏘는 것. “최근 나온 결과에 만족해서, 안 파고 넘어간 지점이 있는가.” 이 질문을 루틴으로 만들면, 남들이 무너지는 걸 구경하던 렌즈가 내가 무너지기 전에 잡아내는 센서로 바뀐다.
누구나 만드는 세상이 온다. 맞다.
그래서 나는 도구가 손대지 못하는 층을 파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