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능력을 믿지 않는다
— 어느 결과주의자의 사고 설계 노트 | 나는 능력을 믿지 않는다 — 어느 결과주의자의 사고 설계 노트 학부 마지막 학기, 캡스톤 논술의 주제로 주인-대리인 문제를 골랐다. 소재는 대우조선해양이었다. 국민 노후자금을 굴리는 국민연금이 그 회사의 주식과 채권에서 2천억 원이 넘는 손실을 봤고, 두 기관은 소송비까지 태워가며 싸우고 있었다. 주인이 대리인에게 일을 맡기는 순간 비용은 발생한다. 감시
나는 능력을 믿지 않는다
— 어느 결과주의자의 사고 설계 노트
학부 마지막 학기, 캡스톤 논술의 주제로 주인-대리인 문제를 골랐다. 소재는 대우조선해양이었다. 국민 노후자금을 굴리는 국민연금이 그 회사의 주식과 채권에서 2천억 원이 넘는 손실을 봤고, 두 기관은 소송비까지 태워가며 싸우고 있었다. 주인이 대리인에게 일을 맡기는 순간 비용은 발생한다. 감시해도 발생하고, 감시하지 않아도 발생한다.
그때 내 결론은 단순했다. 대리인 비용은 상수다. 없앨 수 없다. 없앨 수 없다면, 성장하는 총 파이가 그것을 상쇄해야 한다. 기업은 대리인 비용을 상회하는 성장을 해야 한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논지는 같다. 다만 해상도가 달라진 듯 하다.
나는 능력주의를 추구한다.
그런데 능력 자체는 믿지 않는다.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이게 가장 깔끔한 입장이다. 능력은 관측되지 않는다. 능력은 결과를 보고 우리가 거꾸로 붙이는 사후 라벨이다. 성공한 사람을 보고 “역시 유능했네” 하고, 실패한 사람을 보고 “무능했네” 한다. 대우조선 경영진이 유능했는지 무능했는지도 결과가 터지고 나서야 드러났다. 그 라벨을 실체로 착각하는 순간, 학벌과 스펙 같은 대리지표가 능력 행세를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을 열어보지 않는다. 결과를 본다.
너무 추상적이니까 문제를 작게 쪼개보자.
학교에 욕심 많은 애가 있다. 그 애가 봉사활동에 자발적으로 손을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시키면 된다.
걔 마음속에 이타심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관측되지도 않는다. 중요한 건 손을 들었다는 결과고, 봉사가 굴러간다는 결과다. 욕심이 많은 게 뭐가 문제인가. 봉사는 되는데.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진짜다.
손을 든 순간, 걔는 트랩에 걸렸다.
걔는 봉사시간이든 생활기록부든, 뭔가 챙길 게 있어서 들어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 궤도에 올라탄 이상 봉사를 해야 한다. 동기가 무엇이었든 구조가 걔를 봉사시킨다. 걔도 이득을 보고, 판도 봉사를 얻는다. 아무도 손해 보지 않는다.
나쁜 트랩은 참가자를 손해 보게 해서 원망을 낳는다. 원망이 쌓이면 사람들은 빠져나갈 구멍을 판다. 좋은 트랩은 참가자도 이득이라 도망갈 이유가 없다. 오히려 제 발로 더 들어온다. 자발성은 그대로 두고, 방향만 정해지는 것이다.
처음엔 계산이었던 행동이 반복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되면 어느 순간 결이 바뀐다. 사람은 자기 행동을 보고 거꾸로 자기 태도를 맞춘다.
“내가 이걸 계속 하고 있네. 나는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착해서 봉사하는 게 아니다. 봉사하다 보니 착해지는 것이다. 정상적으로 설계 된 사회라면.
감시는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감시가 빠지면 원래대로 돌아간다. 그래서 영원히 감시해야 한다. 인센티브도 사람을 바꾸지 못한다. 보상이 끊기면 행동도 끊긴다.
좋은 트랩은 사람 자체를 바꾼다. 어느 시점을 넘어가면 트랩이 없어도 걔가 알아서 그 방향으로 간다.
시스템의 최종 형태는, 시스템이 사라져도 굴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과만 믿기로 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설계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동기를 믿는 사람에게는 시스템이 필요 없다. 착한 사람에게 맡기면 되니까. 그런데 마음속을 열어보지 않기로 한 사람은, 마음 대신 시스템이 판정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순간 남는 질문은 하나다. 결과를 무엇으로 재고, 어디로 흐르게 할 것인가.
건축가의 일은 사람을 고치는 게 아니다. 욕심이 좋은 출력으로 떨어지도록 지형을 파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이득을 따라 들어왔다가, 결국 선한 궤도에 착지하고, 그러다 진짜로 선해지는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