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운더 블로그
·11분·에세이·조회

나의 뿌리 - 두 개의 생존 방식 사이에서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외가와 친가. 나의 뿌리. | 두 개의 생존 방식 사이에서 우리 집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생존 방식이 있었다. 부모님, 두 사람은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다. 어머니는 공부해야 이 고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아버지는 세상은 공부만으로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 어머니는 누구보다 성실한 집안 덕에, 다행히 당시 시골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셨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생존 방식이 있었다.

부모님, 두 사람은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다.

어머니는 공부해야 이 고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아버지는 세상은 공부만으로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 어머니는 누구보다 성실한 집안 덕에,

다행히 당시 시골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셨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아주 배고팠던

외할아버지의 역사가 담겨있다.

1960‘s, 당시 누가 봐도 수려한 외모의 20대의 외할아버지는 그 당시 젊은 시절에 최전방에 입대해 군인으로 복무하셨다.

외할아버지는 그 시절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들 먹을 게 없어 배를 많이 곪던 시절이었다. 배를 정말 많이 곪았단다.”

그리고 제대 후, 1970‘s 역동적인 산업화의 한가운데 속에서 그 누구보다 야망 있던 청년은 서울에서 꿈을 펼치기 위해 여러 일들을 오가셨다.

”농사 지을 사람이 없다. 무안 집으로 내려와라. “

외할아버지는 당시 작은 땅에 농사를 지을 일손이 없다는 증조외할아버지의 요청에, 많은 꿈을 뒤로 한채 시골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결혼 후,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직접 농사를 지으시며, 작은 논 마지기에서 시작해, 점차 땅을 조금씩 조금씩 사들여 넓혀가셨다.

자식들 모두 열심히 소를 길러서 대학을 보냈고, 취직도 시키고 자리 잡을 수 있게 둿바라지 하셨다.

두 분은 평생을 그 힘든 논농사, 밭농사 그리고 소 키우기를 하셨고, 그리고 외할아버지 노년에는 아파트 경비실 일까지 거의 20년을 하셨다.

지금도 80대 후반의 외할아버지는 무안 행정기관에서 노인 일자리를 공지하지도 않는 아주 태만한 행정처리에도 불구하고, 직접 오토바이를 끌고 찾아가 노인 일자리를 손수 알아보고, 지금도 주변 버스정류장과 시설을 관리하신다.

나중에 내가 커서 알게 된 사연이 있다. 아래의 사연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사실 외할아버지는 아픈 사연이 있었다.

외할아버지의 동생분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농사짓느라 공부를 할 기회가 없었지만,

일찍이 머리가 비상했던 외할아버지의 동생할아버지는 당시 외할아버지의 지원을 받으며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를 하셨다.

결국 동생할아버지는 유망한 공무원이 되셨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중년의 나이에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리고 자식들(지금의 5촌 삼촌들과 이모)을 두고 어릴 때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 항상 밝게만 보이셨던 그분의 부인이신 할머니께서는, 언제나 우리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집에 항상 밝은 얼굴로 두 손을 가득 채워 자주 찾아오신다.

그 집안의 삼촌들과 이모들은 좋은 직업을 얻어 축복 속에서 결혼하셨고, 아이들과 행복하게 사신다.

혼자서 삼 남매를 키우신 그 할머니분도,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도, 정말 고생이 많으셨다.

그리고 특히나 외할아버지는 친동생에게뿐 아니라

자식들, 즉 삼촌들과 엄마에게도 아주 교육열이 강하셨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도 어머니는 교육, 즉 학업의 가치를 믿었다.

즉, 정리하면 외할아버지는 농사를 작은 땅에서 시작해 논을 조금씩 넓혔고,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자리에서 출발해, 오랜 시간 축적하며 집안을 일으켰다. 어머니는 그 축적의 과정을 보며 자랐다.

한 세대가 고생했으면 다음 세대는 더 높은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어머니에게 자식의 공부는 단순히 좋은 성적을 받는 일이 아니었다.

더 나은 삶으로 올라가기 위한 사다리였고,

몸으로 고생하지 않기 위한 탈출구였으며,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자산이었다.

외가는 그런 곳이다.

항상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버선발로 나와서,

"우리 강아지 잘 있었어?"

하고 먼저 마당으로 나와 자식들과 손주들을 따뜻하게 반겨주는 가풍이다.

반면 아버지는 어렸을 때, 이사를 많이 다니셨고, 가족들이 흩어져 살았다.

아버지는 현장을 믿었다.

친할아버지는 키가 큰 세무공무원이셨다.

친할아버지는 어린 시절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셨다.

독자인 친할아버지는 홀어머니와 지내며,

당시 상업고등학교에 진학에 열정적으로 공부하여 세무공무원으로 일하셨다.

외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선비셨고,

청렴하고 올곧으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능력 있는 공무원이셨다.

그래서일까,

당시 많은 식솔들을 모두 지원할 형편이 안되서였을까,

아무래도 장남 위주의 지원과 교육환경 위주였고,

그 환경에서도 고모는 열심히 공부하여 장학금으로 대학을 나오셨다.

결국 어린 시절에 검도라는 운동에 몸을 담던 아버지는 대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몸으로 세상을 배웠다.

그리고 아버지는 직접 건설 현장에서 기술을 익혔고, 사람을 상대했으며, 사업을 일으켰다.

도면과 자재, 공정과 인력, 거래처와 행정을 동시에 감당하며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다.

이런 아버지에게 세상은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직접 부딪쳐 보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며 알아가는 것이었다.

말보다 결과가 중요했고, 학벌보다 일을 해내는 능력이 중요했다.

즉, 스스로 대학 없이도 살아남았기 때문에 자식의 학문적 교육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부모님, 두 사람은 자식을 사랑하는 방식이 달랐다.

어머니는 공부해야 이 고생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아버지는 세상은 공부만으로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눈에 건설 현장에서 몸을 쓰는 아버지는 때로 답답하고 못마땅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의 부모가 의사나 전문직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아버지의 직업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어린 나에게 직업은 일의 본질보다 간판으로 먼저 보였다.

깨끗한 옷을 입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은 성공한 사람처럼 보였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현장에서 돌아오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는지만 보았지,

그 일을 통해 무엇을 감당하고 있는지는 보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나도 기술자가 되었다.

아버지가 뙤약볕 아래에서 건설자재, 공정과 사람을 다루었다면, 나는 인공지능과 소프트웨어, 사용자와 시장을 다룬다.

아버지가 건축물을 현실에 세웠다면, 나는 보이지 않는 기술을 제품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다.

그리고 나 역시 사업을 하고 있다.

특히나 직접 돈을 벌어 보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매출 한 건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돈을 벌어도 비용을 빼고 나면 얼마나 많은 것이 남지 않는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기술 자체보다 더 어려울 때가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었다.

일을 잘하는 것과 사업을 유지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제품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고객을 설득해야 했고, 계약을 이어가야 했으며, 불확실성을 견뎌야 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사람과 제도, 시장의 속도 속에서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그제야 아버지의 일이 다르게 보였다.

아버지는 단순히 몸을 써서 일한 사람이 아니었다.

현장의 기술자였고, 사람을 관리하는 책임자였으며, 돈의 흐름을 읽어야 하는 사업가였다.

공사를 잘하는 것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발주처와 거래처를 상대하고, 복잡한 행정과 서류를 통과하며, 때로는 답답한 제도의 속도까지 견뎌야 했다.

특히 예전의 건설업에서 공무원이나 행정기관을 상대하는 일은 사업의 중요한 일부였을 것이다.

성질을 죽이고, 절차를 맞추고, 일이 멈추지 않도록 관계를 조율하는 능력.

그것은 도면에도 나오지 않고, 학교에서도 쉽게 가르쳐 주지 않는 기술이었다.

나는 빠르게 만들고 고치고 배포하는 세계에서도 정말 답답함을 느낀다.

그런데 아버지는 훨씬 느리고 무거운 현실 속에서 수십 년 동안 사업을 이어 왔다.

누군가의 한 번의 판단이 공정 전체와 사람들의 생계에 영향을 미치는 세계에서, 가족까지 책임지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교라는 제도적 길을 거치지 않고, 현장에서 직접 배우며 사업을 일으키는 일.

남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언어와 인맥과 자격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일.

몸이 힘들어도 멈출 수 없고, 사업이 불안해도 가족 앞에서는 견뎌야 하는 일.

나는 이제 그 어려움을 조금은 안다.

돈을 조금이나마 벌어 본 뒤에야,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말의 무게를 알게 되었다.

예전에는 아버지가 매일 일하러 나가는 것이 당연한 풍경이었다.

이제는 그것이 매일 반복된 결심이었다는 것을 안다.

어머니가 틀렸던 것도 아니다.

교육을 중요하게 여긴 어머니 덕분에 나는 공부할 수 있었고, 지식과 언어를 얻었다. 더 넓은 세계를 상상하고, 추상적인 문제를 다룰 수 있는 힘을 배웠다.

아버지가 틀렸던 것도 아니다.

현장에서 세상을 배운 아버지 덕분에 나는 기술은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을 안다.

아무리 좋은 생각도 제품이 되지 않으면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돈을 벌지 못하면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돌아보면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자랐다.

어머니에게서는 배움과 상승을 향한 욕망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기다리는 법과 끈기를 배운다.

엄마는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셨고, 지금도 주신다.

엄마는 나의 가장 큰 버팀목이다.

아버지에게서는 기술을 현실의 가치로 바꾸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태도를 물려받았다.

아버지는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주셨고, 지금도 주신다.

아버지는 나의 가장 큰 버팀목이다.

나는 학문을 배웠지만 현장을 떠날 수 없는 사람이고,

기술자이지만 공부와 사업을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인공지능을 다루지만 결국 사람의 문제를 풀어야 하고,

제품을 만들지만 결국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어머니의 세계와 아버지의 세계는 이제 내 안에서 서로 싸우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성한다.

배움이 방향을 만들고, 실행이 현실을 만든다.

사고가 가능성을 열고, 책임이 그 가능성을 지속시킨다.

어릴 때 나는 공부 잘하는 친구들의 부모를 보며 아버지를 비교했다.

그러나 지금은 비교의 기준 자체가 달라졌다.

아버지는 주어진 길을 따라간 사람이 아니었다.

길이 없는 곳에서 자신의 기술과 몸과 판단으로 길을 만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부모님은 그 길 위에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사업을 키우며,

다음 세대가 자신보다 다른 출발점에 설 수 있도록 했다.

나는 아버지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돈을 벌고, 기술을 만들고, 사업을 일구다 보니 알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뿐, 어쩌면 같은 종류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는 현장의 기술자이자 사업가였고,

나는 AI 프로덕트 기술자이자 사업가다.

다루는 재료는 달라졌지만, 기술을 현실로 만들고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한다는 본질은 같다.

아마 그래서 이제야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내가 부모님을 새롭게 존경하게 된 것이 아니다.

부모님이 감당한 삶의 무게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나도 조금은 같은 세계에 이제야 들어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글은 브런치 · 2026년 7월 14일에 처음 발행되었습니다
L
Lee · Lee의 청사진
Founder, MAEUM.io · 기술과 마음 사이
[email protected] 메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