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자유 앞이 어둡게만 느껴질 때가 있다. 세상이 가능성보다 한계를 먼저 말하고, 주변의 사람들이 미래보다 실패를 더 확신하며, 무엇을 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말이 반복해서 들려올 때가 있다. 사람은 그런 환경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며 세상을 받아들인다.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자유
앞이 어둡게만 느껴질 때가 있다. 세상이 가능성보다 한계를 먼저 말하고, 주변의 사람들이 미래보다 실패를 더 확신하며, 무엇을 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말이 반복해서 들려올 때가 있다. 사람은 그런 환경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은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며 세상을 받아들인다.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 놓여 있고, 무엇을 반복해서 보고 듣느냐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니 사람이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인정해야 한다. 어두운 곳에 오래 있으면 세상이 어둡게 보이고, 비관적인 말만 계속 듣다 보면 가능성보다 실패가 먼저 떠오른다.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눈동자는 움직일 수 있다.
이 사실은 작아 보이지만 중요하다. 같은 장소에 있어도 무엇을 바라볼지는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다. 시선을 옮기면 들어오는 정보가 달라지고, 정보가 달라지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의 범위도 달라진다. 세상을 한 번에 바꿀 수 없어도, 내가 바라보는 방향부터 바꿀 수 있다.
상황이 조금 더 허락한다면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 나를 계속 무너뜨리는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다른 환경을 찾아갈 수 있다. 그리고 두 손을 움직일 수 있다면 더 많은 것이 가능해진다. 무언가를 만들고, 고치고, 배우고, 기록하고, 연결하면서 내가 살아가는 환경 그 자체에 개입할 수 있다.
환경은 사람을 만든다. 그러나 사람 역시 환경을 만든다.
세상은 일방향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환경이 감각을 만들고, 감각이 인식을 만들고, 인식이 행동을 만들지만, 인간의 행동은 다시 환경을 바꾼다. 그리고 바뀐 환경은 다시 새로운 감각과 새로운 인식을 만든다.
그래서 자유는 모든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상태가 아니다.
자유는 제약 속에서도 아직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눈동자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두 손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움직임을 통해 내가 받아들이는 정보와 내가 살아가는 환경을 조금씩 바꿀 수 있다는 것.
비관이 위험한 이유는 단순히 기분을 나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다. 비관은 사람에게 움직여도 소용없다고 믿게 만든다. 거짓은 다른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만든다. 사람이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순간 탐색은 멈추고, 행동은 줄어들며, 결국 환경은 정말로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비관은 스스로를 현실로 만든다.
그래서 앞이 어두울수록 움직여야 한다.
억지로 세상이 밝다고 믿으라는 뜻이 아니다. 어둡다면 어둡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어둠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보이는 것이 전부인지 확인하기 위해 눈동자를 움직이고, 다른 곳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 두 다리를 움직이고, 아무것도 없다면 직접 만들어보기 위해 두 손을 움직여야 한다.
삶의 이유 역시 누군가가 완성된 문장으로 건네주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움직이고, 보고, 만나고, 만들고, 실패하고, 다시 움직이는 과정 속에서 발견되는 것일 수 있다.
세상은 나에게 들어온다.
하지만 나 역시 세상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남아 있는 작은 움직임의 공간.
나는 그것을 자유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