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운더 블로그
·7분·에세이·조회

나는 빛을 통제한다

나는 빛을 통제한다 세상의 태양을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다. 물리적인 빛을 다룬다는 뜻도 아니다. 내가 통제하는 것은 내 세상에 들어오는 빛이다. 내가 무엇을 볼지, 무엇을 오래 바라볼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길지, 무엇을 지나칠지를 내가 정한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 전쟁도 있고, 사랑도 있고, 실패도 있고, 기회도 있다. 누

세상의 태양을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다.

물리적인 빛을 다룬다는 뜻도 아니다.

내가 통제하는 것은 내 세상에 들어오는 빛이다.

내가 무엇을 볼지,

무엇을 오래 바라볼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길지,

무엇을 지나칠지를 내가 정한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

전쟁도 있고, 사랑도 있고, 실패도 있고, 기회도 있다.

누군가는 같은 도시를 보며 피로를 느끼고,

누군가는 같은 도시에서 가능성을 본다.

누군가는 한 사람의 결점을 먼저 보고,

누군가는 그 사람 안의 가능성을 먼저 본다.

누군가는 산업을 보며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같은 산업 안에서 아직 아무도 잡지 않은 빈 공간을 발견한다.

현실은 하나인데,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는 서로 다르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어디에 빛을 비추는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가 세상을 전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연은 존재한다.

사고도 일어난다.

사람의 마음은 바뀐다.

시장도 움직이고, 국가도 움직이고, 시대도 움직인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권한은 따로 있다.

나는 무엇을 바라볼지 결정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을 바라보느냐는 결국 내가 무엇을 생각하게 되는지를 결정한다.

생각은 판단을 만들고,

판단은 행동을 만들고,

행동은 반복되고,

반복된 행동은 실제 세계를 조금씩 바꾼다.

그래서 시야는 단순한 관찰이 아니다.

행동의 시작점이다.

나는 어두운 것을 보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문제가 있다면 본다.

불편하다면 본다.

썩은 구조가 있다면 본다.

사람이 불필요하게 고생하고 있다면 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바라보며 끝내고 싶지 않다.

어둠을 발견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지 않는다.

나는 항상 그다음을 본다.

어디에 빛을 비추면 구조가 보이는가.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가.

누가 어떤 유인으로 움직이는가.

무엇을 바꾸면 다른 결과가 나오는가.

어떤 기술을 넣으면 사람이 더 이상 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가.

나는 문제를 볼 때도 문제 자체보다 문제를 움직이는 구조에 더 오래 빛을 비춘다.

그래서 내게 낙관주의는 세상이 잘될 것이라고 믿는 일이 아니다.

비관주의 역시 세상이 망할 것이라고 믿는 일이 아니다.

둘 다 나에게는 충분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느 부분에 개입할 수 있는가

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결과를 기다리는 태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에게는 진인사대천명보다

盡人事取天命.

진인사취천명.

사람의 일을 다한 뒤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조건을 끝까지 움직여 결과를 취한다는 말이 더 맞다.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이 아니다.

반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의 범위를 너무 일찍 선언하지 않는 태도다.

이것은 내가 장소를 바라보는 방식과도 닮아 있다.

나는 광주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광주를 특별히 ‘돌아가야 할 고향’이라고 느끼지는 않는다.

내게 고향은 출생지가 아니다.

내가 지금 살아가는 곳이 고향이다.

서울에 있으면 서울이 내가 살아가는 세계다.

다른 도시로 가면 그곳이 내가 살아가는 세계가 된다.

어떤 나라에 가더라도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고, 관계를 맺고, 책임을 지기 시작하면 그곳은 더 이상 남의 땅이 아니다.

나는 내가 있는 곳에 빛을 비춘다.

그곳의 사람을 보고,

그곳의 문제를 보고,

그곳의 가능성을 본다.

그래서 나는 세계를 이동할 때 고향을 버리는 사람이 아니다.

고향의 범위를 넓히는 사람이다.

이 감각은 내가 인공지능을 바라보는 방식과도 연결된다.

나는 AI를 기술 그 자체로 바라보는 데 큰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이 사람의 삶에서 무엇을 없애고 무엇을 남기는가다.

한 사람이 매일 두 시간을 의미 없는 반복업무에 쓰고 있다면 나는 그 두 시간을 본다.

한 사업자가 매일 밤 정산과 고객응대 때문에 가족과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면 나는 그 시간을 본다.

한 직원이 이미 컴퓨터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면 나는 그 구조를 본다.

그리고 묻는다.

왜 아직 사람이 이것을 하고 있지?

내가 빛을 비추는 곳은 바로 그런 지점이다.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을 기계에게 넘기고,

인간에게는 판단하고, 사랑하고, 만들고, 관계 맺고, 쉬고, 생각할 시간을 돌려주는 것.

내가 말하는 인간해방은 거창한 철학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사람의 시간을 다시 사람에게 돌려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빛을 통제한다는 것은 세상의 좋은 면만 선택해서 본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그것은 통제가 아니라 도피다.

진짜 통제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다.

봐야 하는 것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좋은 가능성도 보고,

불편한 사실도 보고,

내가 틀렸다는 증거도 보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보고,

내 사업을 위협하는 구조도 본다.

그리고 그 모든 것 가운데 어디에 가장 많은 시간을 쓸지 내가 결정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매일 수천 가지 정보에 노출된다.

그 모든 것에 똑같은 무게를 줄 수는 없다.

결국 인생은 무엇을 봤느냐보다

무엇을 계속 바라봤느냐

에 의해 만들어진다.

나는 내가 보는 세계가 실제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시야 밖에도 수많은 현실이 존재한다.

내가 모르는 사람도 있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문화도 있고,

내 판단이 틀리는 순간도 있다.

그래서 빛을 통제한다는 말에는 동시에 책임이 따른다.

내가 어디에 빛을 비추느냐에 따라 어떤 것은 보이고 어떤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끔은 내가 보지 않던 방향으로도 일부러 빛을 돌려야 한다.

내 생각에 반대되는 사람에게.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삶에.

내가 실패했던 이유에.

내가 싫어했던 사람의 입장에.

내가 성공하고 있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있던 위험에.

빛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빛을 바꿀 책임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도 마지막 선택은 내가 한다.

세상이 내 눈앞에 무엇을 던져놓든,

나는 무엇을 오래 바라볼지 정한다.

공포를 오래 바라볼 수도 있고,

분노를 오래 바라볼 수도 있고,

가능성을 오래 바라볼 수도 있다.

상처를 오래 바라볼 수도 있고,

그 상처 이후의 사람을 바라볼 수도 있다.

문제를 바라볼 수도 있고,

문제를 푸는 구조를 바라볼 수도 있다.

나는 그 선택이 인생에서 생각보다 훨씬 큰 차이를 만든다고 믿는다.

빛이 달라지면 세계가 달라 보인다.

세계가 달라 보이면 선택이 달라진다.

선택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진다.

그리고 행동이 오래 누적되면,

처음에는 단지 내 시야의 차이였던 것이 실제 세계의 차이가 된다.

그래서 나는 빛을 통제한다.

세상을 전부 지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살아가는 세계를 남에게 맡기지 않기 위해서다.

내 눈이 어디를 향할지,

내 시간이 어디에 쓰일지,

내가 무엇을 사랑할지,

내가 무엇을 바꿀지,

나는 가능한 한 직접 선택하고 싶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내가 가진 통제권까지 포기할 이유는 없다.

나는 내 세상의 빛을 고른다.

그리고 그 빛이 닿는 곳에서

나는 보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조금씩 현실을 바꾼다.

그게 내가 말하는,

빛을 통제한다는 뜻이다.

이 글은 브런치 · 2026년 8월 29일에 처음 발행되었습니다
L
Lee · Lee의 청사진
Founder, MAEUM.io · 기술과 마음 사이
[email protected] 메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