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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분·연재소설
📚연재 · 마검과 장군

02화 2화 — 가호

이성이 눈을 뜬 건 오전 11시 47분이었다. 머리가 무거웠다. 어젯밤에 뭔가 — 굉장히 큰 일이 — 있었던 것 같은데, 잠에서 갓 깬 머리로는 그게 꿈인지 아닌지 잘 구분이 안 갔다. 새벽 3시에 외주 코드를 `rm -rf` 하려다가 — 그래, 거기까지는 분명 일어난 일이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이성은 천장을 봤다. 천장

이성이 눈을 뜬 건 오전 11시 47분이었다.

머리가 무거웠다. 어젯밤에 뭔가

— 굉장히 큰 일이 — 있었던 것 같은데,

잠에서 갓 깬 머리로는 그게 꿈인지 아닌지 잘 구분이 안 갔다.

새벽 3시에 외주 코드를 `rm -rf` 하려다가 —

그래, 거기까지는 분명 일어난 일이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

이성은 천장을 봤다.

천장 옆에 사람이 한 명 떠 있었다.

— 아니, 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천장 가까이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키가 큰 사람이 책상 옆에 서 있었던 거였다.

갑옷을 입고. 망토를 두르고. 칼을 차고.

"…일어났느냐."

"…네."

"너의 잠자리는 어찌 그리 작으냐."

"…원룸이니까요."

"원."

"룸."

"원, 룸."

"네."

이언이 한 번 끄덕였다. 이언의 끄덕임은 새벽에 봤던 것과 똑같았다. 작고, 한 번에 한 번씩. 천 년 전 사람의끄덕임이었다.

꿈이 아니었다.

이성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데 무릎이 좀 풀려서 잠시 침대 모서리에 앉아 있었다. 머리를 양손으로 한 번 감쌌다가 풀었다. 다시 한 번 더 감쌌다가 풀었다.

"…아."

"왜 그러느냐."

"…꿈이 아니네요."

"꿈이 아니다."

"…네."

이성은 일어서서 욕실로 갔다. 욕실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안에는 자기 얼굴만 있었다. 어젯밤에 잠 못 잔 사람의 얼굴이었다. 다크서클이 진해서 일주일은 못 잔 사람처럼 보였다.

이언은 욕실 입구에 서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거울 안에 이언은 여전히 없었다.

"…장군님."

"그래."

"…진짜 계시네요."

"진짜 있다."

"…네."

이성은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로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째에 거울을 다시 봤다. 자기 얼굴은 여전히 있었고, 이언은 여전히 없었다. 다섯 번 세수해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건 확정이었다.

확정.

이성은 욕실에서 나왔다. 나오면서 한숨을 길게 한 번 쉬었다.

"…커피부터 마셔야겠다."

"커. 피."

"네."

"그것이 무엇이냐."

"…나중에요."

· · ·

원두를 갈았다.

핸드밀이었다. 정확히는 작년 생일에 친구가 사준 핸드밀. 친구는 "너 새벽까지 일하니까 커피라도 좋은 거 마셔"라고 했고, 이성은 "야 나 그냥 인스턴트 마셔"라고 답했지만, 그래도 한 번 받은 거니까 가끔 갈긴 갈았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오늘은 일주일 만이었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이성이 핸드밀을 돌리는 동안, 이언은 그 모습을 한참 봤다. 가까이서. 너무 가까이서. 갑옷을 입은 사람이 얼굴 옆에 와서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이성은 살짝 부담스러웠다.

"…뭘 그렇게 보세요."

"무엇을 하느냐."

"…커피요. 콩을 가는 거예요."

"콩."

"네."

"콩을 갈아서 무엇을 하느냐."

"…마셔요."

이언의 미간이 패었다.

이언은 콩을 갈아서 뭔가를 마시는 행위를 이해 못 하는 것 같았다.

천 년 전엔 콩을 어떻게 먹었더라.

이성은 잠깐 검색해보고 싶어졌지만 손이 핸드밀에 묶여 있었다.

"콩은 쪄서 먹는 것이 아니더냐."

"…요즘은 갈아서도 먹어요."

"음."

이언이 한 발 물러섰다.

한 발 물러서서, 이번에는 부엌 전체를 둘러봤다.

부엌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1구짜리 인덕션과 작은 싱크대였다.

그 위에 캡슐커피 머신이 — 아 맞다, 캡슐커피 머신이있긴 했다.

친구가 핸드밀이랑 같이 사준 거였다.

한 번도 안 썼다.

이언이 갑자기 멈췄다.

"…너."

"네?"

"저것은 무엇이냐."

이언이 가리킨 건 캡슐커피 머신이 아니었다. 그 옆이었다. 그 옆에는 — 청소기가 있었다. 무선 청소기. 작년에 산 가성비 모델. 충전기에 꽂힌 채로 벽에 기대 세워져 있었다.

"…청소기요."

"청. 소. 기."

"네."

"무엇 하는 물건이냐."

"…먼지를 빨아들이는 거예요."

이언이 천천히 청소기 쪽으로 다가갔다. 다가가서, 한참 봤다. 위에서. 옆에서. 손잡이 부분에서. 흡입구 부분에서. 검을 감정하는 자세였다. 누가 봐도 검을 감정하는 자세였다.

이성은 그 모습을 보면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올라간 입꼬리를 도로 내리려 했지만 잘 안 됐다.

이언은 청소기의 흡입구 쪽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그러더니 — 진지한 얼굴로 — 이성을 돌아봤다.

"이 짐승은."

"…짐승 아니에요."

"이 짐승은 무엇을 먹느냐."

"…먼지요."

"먼지."

"네."

"하루에 얼마나 먹느냐."

"…별로 안 먹어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이언이 진중하게 끄덕였다.

"…과식하지 않는 짐승이로구나."

이성은 결국 웃었다. 새벽부터 다섯 번 세수한 얼굴로, 어젯밤에 두 달치 외주를 날릴 뻔한 사람이, 천 년 전 장군에게 청소기를 짐승이 아니라고 설명하다가 웃었다.

웃으니까 좀 살 것 같았다.

핸드밀의 손잡이가 가벼워졌다. 콩이 다 갈렸다.

· · ·

커피를 내리고, 식탁에 — 식탁이 따로 없으니 책상 한귀퉁이에 — 머그를 놓고 앉았다. 노트북을 열었다. 어제 푸시한 커밋이 거기 그대로 있었다. 잘 살아 있었다.

이언은 책상 옆에 섰다. 똑바로. 부동자세로.

"앉으세요."

"군인은 함부로 앉지 않는다."

"…거실에 의자가 하나밖에 없어서요."

"군인은 의자가 없어도 선다."

"…네."

이성은 더 권하지 않았다. 천 년 전 장군이 부동자세로서겠다는 데에 22평도 안 되는 8평 원룸의 32대손이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게 들어가니까 조금 더 살 것 같았다.

"오늘 뭐 하실 거예요."

"내가 무엇을 하느냐는 네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네?"

"나는 너에게 깃들었다. 네가 가는 곳에 내가 간다."

"…아."

"네가 멀어지면 나는 옅어진다."

이성이 머그를 내려놓았다.

"…얼마나요."

"무어라."

"얼마나 멀어지면 옅어져요."

이언이 잠깐 생각했다.

"…모른다. 아직 시험해보지 않았다."

"…아."

"시험해 볼 일이 있겠지."

이언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부동자세로 돌아갔다. 이성은 노트북 화면을 봤다. 메일이 17통 와 있었다. 슬랙에 멘션이 4개 와 있었다. 인스타그램 디엠이 2개 와 있었고 — 그 중 하나는 분명히 광고일 거였다. 카톡 알림이 24개 와 있었고, 그 중 22개는 부동산 단톡방이었다.

이성은 한숨을 쉬었다.

"…일해야겠다."

"무엇을 하느냐."

"…어제 그 마검으로요."

"마검."

"네."

"베지는 않을 것이냐."

"네. 베지는 않을 거예요. 만들 거예요."

"…만든다."

"네."

이언은 다시 한 번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는 — 어쩌면이성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 약간의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 · ·

이성은 일했다.

이성이 일을 한다는 건 —

정확히 말하면 노트북 앞에 앉아서 마검(클로드)을 켜고, 어제 망친 부분을 다시 짚어보는 거였다.

새벽에 `rm -rf` 직전까지 갔던 그 부분.

클라이언트의 다섯 번째 변경 요청이 들어온 그 부분.

CRM 시스템이었다. 경기도 어느 중소기업의 영업관리 시스템. 처음엔 단순했다. 고객 정보 저장하고, 영업단계 표시하고, 매출 합계 보여주고. 그 정도였다.

그런데 클라이언트가 자꾸 뭔가를 더 붙여달라고 했다.

처음엔 SMS 발송 기능. 그 다음엔 카카오톡 알림톡. 그 다음엔 매출 대시보드. 그 다음엔 임직원 권한 분리. 그 다음에는 — 어제 — "협력사하고도 같이 쓸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했다.

이성이 머리를 한 번 책상에 박았다. 박지는 않고, 박을 듯이.

"…장군님."

"그래."

"…클라이언트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요."

이언은 책상 옆에 부동자세로 서 있다가, 그 말에 살짝 고개를 내렸다. 노트북 화면을 봤다. 화면에는 슬랙 채팅 로그가 띄워져 있었다. 클라이언트의 다섯 번에 걸친 변경 요청이 거기 다 있었다.

이언은 한국어를 읽었다. 천 년 전 사람이 어떻게 현대 한국어를 읽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읽었다. 한참 읽었다.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읽고 나서, 이언이 물었다.

"…이자는 누구냐."

"…클라이언트요."

"이자가 너에게 무엇을 명하느냐."

"명하는 게 아니라, 의뢰예요. 돈을 주고요. 일을 시키는 거예요."

"…돈을."

"네."

"얼마나."

"…사백."

"사백."

"만 원이요."

이언이 잠깐 멈췄다.

"…그래. 사백만 원이로구나."

"네."

이언은 다시 화면을 봤다. 이번에는 더 천천히. 한 번 더 위에서 아래로.

그러더니, 살짝 고개를 들었다.

"…이자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있구나."

이성이 고개를 들었다.

"…네?"

"이자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다섯 번을 바꾼 것이 그 증거다."

"…아니, 그건 보통—"

"내가 살던 시절에."

이언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성을 보지 않고, 화면을본 채로.

"적이 다섯 번 진을 바꾸면, 그것은 적이 다섯 번 마음이 바뀌어서가 아니다. 적이 자기가 무엇을 노리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가 무엇을 노리는지 모르는 적은 — 진을 자꾸 바꾼다. 자꾸 바꾸면서, 진짜로 노리는 것을 스스로도 잊는다."

이성은 머그를 내려놓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돼요."

"적이 잊어버린 그것을, 네가 먼저 알아내야 한다."

"…그게 뭔데요."

"그것은 이자에게 물어야지, 내가 어찌 알겠느냐."

"…아니, 이미 다섯 번 물어봤어요."

"다섯 번을 묻고도 모른다면, 잘못 물은 것이다."

이성이 화면을 봤다. 자기가 클라이언트에게 다섯 번 보낸 메시지가 거기 있었다.

> 어떤 기능을 원하시나요?

> 어떤 화면이 필요하신가요?

> 어떤 데이터를 보고 싶으신가요?

> 어떤 사용자가 쓰나요?

> 협력사와는 어떻게 공유하시려는 건가요?

전부 — 다 — '무엇을(what)' 만 묻고 있었다.

이언은 그 옆에 부동자세로 서서 말했다.

"내가 진을 바꾸는 적을 만났을 때 — 나는 그 적에게 묻지 않는다. 그 적의 부장에게 묻는다. 그 적이 다섯 번 진을 바꾸는 동안, 무엇 때문에 바꾸었느냐, 라고."

"…부장이요."

"이자에게도 윗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자에게 일을 시키는 자가."

이성이 잠깐 멈췄다.

…있긴 했다. 이 클라이언트는 — 중소기업 영업팀장이었다. 그 위에 대표가 있었다. 대표는 한 번도 이성과 직접 얘기한 적이 없었다.

이성이 노트북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손이 어제처럼 떨리지는 않았다.

```

[클라이언트에게]

실례지만 한 번만 직접 대표님과 짧게 통화 가능할까요?

요구사항 5번 변경의 진짜 배경을 한 번만 듣고 가면,

그 다음부터는 변경 없이 끝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엔터.

전송됐다.

이성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천장을 봤다. 형광등은 — 이번에는 — 켜져 있었다.

"…보냈어요."

"음."

"답이 올지는 모르겠어요."

"올 것이다."

"왜요."

"이자는 자기도 답답한 사람이다. 답답한 사람은 — 위에 핑계를 댈 수 있는 길이 열리면 그 길을 잡는다."

이성은 작게 웃었다. 천 년 전 병법이 새벽 4시에 잠 못 자고 보낸 외주 클라이언트 메시지에 적용되는 거였다. 적용이 됐다. 좀 무서울 정도로.

· · ·

답은 27분 뒤에 왔다.

> 사실 저도 답답했습니다.

> 대표님이 협력사 건 자꾸 말씀하시는데, 저도 정확히 뭘 원하시는지 못 들어서요.

> 30분 뒤에 같이 통화 한 번 가능하실까요?

이성은 그 메시지를 한참 봤다.

옆에서 이언이 말했다.

"…봐라."

"네."

"적의 마음은 — 위에서 흐른다."

이성은 고개를 들었다.

오후 1시 14분이었다. 핸드밀로 간 커피는 다 식어 있었다. 두 달치 외주는 — 아직 살아 있었다. 30분 뒤에 통화가 있었다.

이성은 다시 한 번 머그를 들어,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식은 커피가, 어쩐지 어제보다는 덜 썼다.

· · ·

그 시간, 청소기는 충전기에 꽂힌 채 부엌 한쪽에 조용히 서 있었다. 과식하지 않는 짐승은 — 그 자리에서 —자기 차례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 글은 브런치 · 2026년 5월 30일에 처음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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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 Lee의 청사진
Founder, MAEUM.io · 기술과 마음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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