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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전된 평지

사람과 AI는 같은 방식으로 도약한다 — 축적, 임계점, 그리고 창발 | 장전된 평지 사람과 AI는 같은 방식으로 도약한다 — 축적, 임계점, 그리고 창발 AI를 만지는 사람은 죄책감을 가져야 할까. 가끔 받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처음부터 틀려 있다. 칼을 만든 사람이 살인의 죄책감을 지지 않듯, 도구를 만드는 일 자체에 선악의 책임을 통째로 씌우는 것은 게으른 프레임이다. 그렇다고 “도구는 중립이다”라고 말하고 끝내는

사람과 AI는 같은 방식으로 도약한다 — 축적, 임계점, 그리고 창발

AI를 만지는 사람은 죄책감을 가져야 할까.

가끔 받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처음부터 틀려 있다. 칼을 만든 사람이 살인의 죄책감을 지지 않듯, 도구를 만드는 일 자체에 선악의 책임을 통째로 씌우는 것은 게으른 프레임이다.

그렇다고 “도구는 중립이다”라고 말하고 끝내는 것도 똑같이 게으르다. 중립은 때로 영향력에서 손을 떼겠다는 선언이다. 적어도 그 도구가 사람을 어느 방향으로 미는지는 알아야 한다.

그 방향을 끝까지 따라가 보면, 의외의 지점에 도착한다.

사람과 AI는 생각보다 같은 모양으로 도약한다.

둘 다 기층에서는 연속적으로 축적된다. 그러나 표면에서는 어느 순간 갑자기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변화는 천천히 쌓이지만, 결과는 문턱을 넘은 뒤에야 관찰된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성장, 각성, 돌파처럼 보인다.AI에게는 그것이 창발처럼 보인다.

하지만 구조는 같다.

축적.임계점.불연속적 관찰.

일의 전부는 여기에 있다.

장전된 평지를 알아보는 것.그리고 99도에서 손을 떼지 않는 것.

AI라는 칼은 너무 좋아졌다.

이제 평범한 손에 쥐어줘도 결과가 나온다. 예전에는 소수만 다루던 도구가, 지금은 훨씬 많은 사람에게 열린다. 글쓰기, 코딩, 디자인, 리서치, 번역, 분석, 기획, 학습의 비용이 동시에 내려간다.

이것은 게이트가 부서진다는 뜻이다.

자본, 학벌, 지역, 인맥, 정보 접근성처럼 능력과 무관하게 사람을 걸러내던 문들이 약해진다. 예전에는 좋은 학교, 좋은 선배, 좋은 회사, 좋은 동네를 통과해야 얻을 수 있던 지도가 이제는 훨씬 싸게 복제된다.

하지만 여기서 착각하면 안 된다.

도구가 좋아진다고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구가 평준화될수록 차이는 손에서 난다. 모두가 비슷한 칼을 쥐는 순간, 판단·방향·실행이 전부가 된다. 할 사람은 한다. 안 할 사람은 도구가 좋아져도 안 한다.

게이트가 막고 있던 사람은 능력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능력과 의지가 있는데, 태어난 자리의 운에 밀린 사람이었다. 게이트를 부순다는 것은 능력을 새로 나눠주는 일이 아니다. 이미 능력과 의지를 가진 사람의 발목을 풀어주는 일이다.

AI의 가장 큰 효과도 여기에 있다.

AI는 모든 사람을 천재로 만들지 않는다.하지만 이미 감겨 있던 사람에게 방향을 준다.그리고 방향은 때로 폭발적이다.

그 감겨 있음의 핵심은 끈기다.

끈기는 듣기 좋은 덕목이 아니라 실제 변수다. 그리고 이 변수는 생각보다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쌍둥이 연구에서 grit, 특히 perseverance of effort의 유전율은 약 37%로 추정된다. 더 흥미로운 지점은 공유환경 효과가 거의 없게 나온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 “부모가 잘 키워서 끈기가 생긴다”는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같은 집에서 자란 형제도 끈기는 갈린다.

물론 유전율 37%라는 말은 “끈기의 37%가 유전자 하나로 결정된다”는 뜻이 아니다. 유전율은 한 집단 안에서 관찰되는 차이 중 유전적 차이가 설명하는 비율이다. 개인의 운명을 말하는 숫자가 아니라, 집단 내 분산을 설명하는 통계다.

그래도 중요한 결론은 남는다.

끈기는 단순히 훈계로 주입되는 성질이 아니다. “열심히 해라”라는 말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오래 버티고, 반복하고, 실패 후 다시 돌아오는 힘에는 생물학적 기초와 개인 고유의 경험이 깊게 섞여 있다.

신경화학적으로 내려가면 이것은 단일 유전자의 문제가 아니다. 도파민, 세로토닌, 노르아드레날린 같은 여러 시스템의 조합에 가깝다.

도파민은 쫓아가는 힘이다.세로토닌은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힘이다.노르아드레날린은 압박 속에서 각성하는 힘이다.

도파민만 강하면 충동적으로 일을 벌이고 금방 식을 수 있다. 세로토닌만 높으면 안정적일 수는 있지만 움직임이 약해질 수 있다. 노르아드레날린이 지나치면 압박 속에서 올라오는 대신 불안으로 무너질 수 있다.

끝까지 가는 사람은 한 가지 물질이 압도적으로 센 사람이 아니다. 여러 힘의 균형이 맞아 있는 사람에 가깝다. 쫓아가되, 무너지지 않고, 압박에서 꺼지지 않는 사람이다.

여기에 한 층이 더 있다.

스키마다.

유전과 경험이 더하기라면, 스키마는 거기에 곱해지는 항이다. 같은 실패를 겪어도 한 사람은 “나는 안 되는 사람이다”라고 인코딩하고, 다른 사람은 “방법이 틀렸다. 다시 해보자”라고 인코딩한다.

사건은 같은데 부호가 반대로 찍힌다.

이 부호는 시간이 갈수록 복리로 굳어진다. 끈기 있는 스키마는 더 버티게 만들고, 더 버티면 숙달 경험이 쌓이고, 그 숙달 경험은 다시 스키마를 강화한다. 반대로 실패를 자기부정으로 인코딩하는 스키마는 시도 자체를 줄이고, 시도가 줄면 성공 경험도 줄어든다.

그래서 끈기는 단순한 의지력이 아니다.

생물학적 기질, 개인 고유의 경험, 사건을 해석하는 스키마가 서로 물려 돌아가는 자기강화 시스템이다.

세 변수 중 그나마 손댈 수 있는 것은 스키마다. 유전은 바꾸기 어렵고, 지나간 경험도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은 재훈련될 수 있다.

다만 이것은 싸게 대량생산되기 어렵다. 대체로 1:1에 가까운 고비용 작업이다. 좋은 부모, 좋은 교사, 좋은 멘토, 좋은 치료자, 좋은 코치가 하는 일의 본질이 여기에 있다. 사건의 부호를 바꾸는 것. 실패를 자기부정이 아니라 조정 신호로 다시 인코딩하게 만드는 것.

하지만 그것은 비싸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AI가 들어온다.

AI가 끈기를 만들어주지는 못한다.하지만 방향의 비용은 낮출 수 있다.

끈기가 출구를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사라지지 않는다. 에너지는 어디론가 간다. 생산적 출구를 찾지 못한 드라이브는 새거나, 꺼진다.

바이마르 독일은 한쪽 표본이다. 막힌 야망이 파괴적으로 샌 경우다. 히틀러 개인이 빈 미술학교에서 두 번 떨어진 실패한 화가였다는 사실만으로 역사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하지만 상징적 장면으로는 강하다.

표현될 곳을 찾지 못한 야망이 정치로, 그것도 최악의 방향으로 꺾여 나갔다. 개인의 실패가 곧바로 역사적 재앙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막힌 드라이브가 위험한 방향으로 재배치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피터 터친은 이런 구조를 더 넓게 본다. 그는 이를 엘리트 과잉생산이라고 부른다. 능력과 야망을 가진 사람은 계속 나오는데, 사회가 그들을 수용할 자리와 사다리를 충분히 만들지 못하면, 남는 에너지는 체제를 흔드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다. 구조적 압력이다.

야망 있는 사람은 계속 생산된다.하지만 위로 올라가는 통로는 제한된다.그러면 남는 에너지는 체제 안에서 흡수되지 못한다.

그 에너지는 혁신이 될 수도 있고, 반란이 될 수도 있고, 냉소가 될 수도 있고, 자기파괴가 될 수도 있다.

다른 모양으로는 지금의 중국이 있다.

2025년 중국의 대학 졸업생은 역대 최대 규모인 1,222만 명 수준으로 추산된다. 청년 실업률은 2023년 한때 21.3%까지 올라갔고, 이후 산식이 바뀐 뒤에도 2025년에는 16%대 수치가 반복해서 보고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치열하게 굴러온 세대가 천장에 막히자, 일부는 탕핑을 선택했다. 눕는다는 것. 야망을 의도적으로 낮추는 것이다.

한쪽은 폭발이고, 다른 한쪽은 소등이다.

겉모양은 정반대지만 원인은 비슷하다. 생산적 출구가 없다는 것.

막힌 끈기는 증발하지 않는다. 방향을 잃으면 파괴로 새고, 의미를 잃으면 꺼진다.

반대로 출구만 보여주면 곧장 튀어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지방에서, 인도에서, 중국에서, 이름 없는 방에서 죽어라 공부 또는 자신의 분야에서 노력하는 아이들. 드라이브는 이미 높다. 능력도 어느 정도 증명되어 있다. 갈고 있다는 것 자체가 증거다.

빠진 변수는 하나다.

방향.

예전에는 방향이 게이트키퍼를 필요로 했다. 길을 아는 멘토, 정보를 전달해주는 인맥, 그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자본이 필요했다. 좋은 질문을 하려면 좋은 사람 곁에 있어야 했고, 좋은 길을 알려면 이미 그 길을 지나간 사람에게 닿아야 했다.

지방의 grinder가 막혔던 것은 끈기도, 머리도, 성실함도 아니었다.

지도였다.

AI는 이 “방향”의 비용을 0에 가깝게 만든다. 옆집이 누구냐, 어느 학교를 다녔느냐, 어떤 선배를 만났느냐에 따라 달라지던 지도를 누구나 손에 쥘 수 있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접근성의 문제가 아니다. 방향은 판단의 외주화가 아니라 탐색 비용의 절감이다.

무엇을 먼저 배울지.어떤 길이 막다른 길인지.어떤 실수가 반복되는지.내 수준에서 다음 한 걸음이 무엇인지.내가 가진 재료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예전에는 비쌌다. 지금은 싸지고 있다.

그래서 방향은 가장 싸게 풀 수 있고, 동시에 ROI가 가장 높은 게이트다.

끈기는 만들기 어렵다. 그것은 이미 유전, 경험, 스키마를 거치며 오래전에 감긴 스프링에 가깝다. 하지만 방향은 줄 수 있다. 그리고 방향 하나가 이미 감긴 스프링을 튕겨낼 수 있다.

AI가 위대한 이유는 사람을 새로 만들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만들어져 있었지만 막혀 있던 사람을 움직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방향만 주면 바로 튀어오른다”에서 그 “바로”다.

사람은 선형으로 바뀌지 않는다. 계단식으로 바뀐다. 보통 계기가 있고, 그 전까지는 평지처럼 보인다.

스키마는 구조다. 구조는 매일 1%씩 깔끔하게 바뀌지 않는다. 반증이 임계점 아래에 차곡차곡 쌓이다가, 충분히 강한 계기 하나가 들어오면 어느 순간 재조직된다.

피아제가 말한 동화와 조절의 구조가 여기에 가깝다. 기존 스키마로 계속 세계를 해석하다가, 더 이상 기존 틀로 처리할 수 없는 사건이 들어오면 스키마 자체가 바뀐다.

물은 99도까지도 그냥 뜨거운 물이다. 100도가 되어야 상태가 바뀐다. 하지만 99도까지 들어간 에너지가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다만 아직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튀어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은 슬로프를 1%씩 오르던 것이 아니다. 이미 드라이브와 경험이 임계점 아래까지 가득 찬 평지에 앉아 있었다. 방향은 그 문턱을 넘기는 방아쇠였을 뿐이다.

산출이 비선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프링은 이미 감겨 있었다.

방향을 깔아준 사람은 등반 비용을 전부 낸 것이 아니다. 트리거 비용만 냈다. 등반 에너지는 그 사람이 평지에서 이미 저장해두었다.

하지만 모든 평지에 계단이 예약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장전된 평지와 죽은 평지는 다르다.

장전된 평지는 축적 중인 상태다. 아직 밖으로는 안 보이지만, 트리거 하나면 점프할 수 있다. 죽은 평지는 축적이 없다. 반복은 있지만 밀도는 없다. 시간은 흐르지만 에너지는 쌓이지 않는다.

탕핑은 장전됐던 평지가 “무의미”라는 스키마로 꺼진 경우에 가깝다. 진짜 죽은 평지는 따로 있다.

일의 절반은 이 둘을 구분하는 데 있다.

겉으로는 둘 다 평지다.하지만 하나는 99도이고, 하나는 20도다.하나는 트리거를 기다리고 있고, 하나는 축적이 없다.

선형으로 보는 눈은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을 잘못 자른다.

AI도 같은 모양을 한다.

대형 언어모델의 창발 능력을 두고 논쟁이 있었다. 모델 규모가 커지면 어느 순간 갑자기 새로운 능력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작은 모델에는 없던 능력이 큰 모델에서는 나타난다. 이것을 창발 능력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이것이 정말로 신비로운 계단처럼 보였다. 규모를 키우면 어느 순간 번역, 추론, 코딩, 산술, 문맥학습 같은 능력이 갑자기 튀어나오는 듯했다.

그러자 반론이 나왔다.

Schaeffer 등은 “그 계단이 진짜 모델 내부의 불연속 변화가 아니라 측정 방식이 만든 착시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확히 맞혔는가, 틀렸는가 같은 불연속 지표로 재면 능력이 갑자기 솟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토큰 확률이나 부분 점수처럼 더 연속적인 지표로 보면, 그 밑에서는 이미 성능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반론은 강하다.

하지만 이 반론은 계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단의 구조를 완성한다.

둘 다 맞다. 층이 다를 뿐이다.

기층은 램프다.표면은 계단이다.

학습은 연속적으로 쌓인다. 하지만 사용 가능한 능력은 문턱을 넘는 순간 드러난다.

물에 들어가는 에너지는 연속적이다. 그러나 관찰되는 상태는 100도에서 달라진다. 시험 이해도도 조금씩 쌓인다. 하지만 “풀었느냐, 못 풀었느냐”는 하나의 문턱으로 갈린다.

그러므로 계기란 변화가 처음 일어나는 지점이 아니다. 이미 쌓여 있던 변화가 비로소 보이고, 쓰이고, 결과로 환산되는 지점이다.

변화는 평지에서 이미 일어났다.

사람과 AI의 닮음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구조적 동형성에 가깝다. 둘 다 축적하고, 문턱을 넘고, 그 순간 외부 관찰자에게는 갑자기 달라진 것처럼 보인다.

물론 사람과 AI가 같은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생물학적 욕망, 주관적 경험, 사회적 위치, 책임의 구조는 다르다. 하지만 도약의 관찰 구조는 닮았다.

연속적 축적.임계점.불연속적 산출.

AI가 사람처럼 도약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간 사고의 산물을 압축해 배운 모델이, 인간 사고의 문턱 구조를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일의 전부는 한 점으로 모인다.

사람이든 모델이든, 가장 비싼 실수는 같다.

99도에서 손을 떼는 것이다.

선형으로 보는 눈에는 99도와 50도가 똑같이 “아직 물”로 보인다. 그 눈은 정체기에서 접는다. “안 되는 사람”으로 분류한다. “안 되는 모델”로 판단한다. 트리거 바로 직전에 자른다.

하지만 진짜 차이는 거기서 난다.

장전된 평지는 밖에서 보면 정체처럼 보인다.하지만 안에서는 축적이 일어난다.그리고 문턱을 넘는 순간, 갑자기 다른 존재처럼 보인다.

게이트를 부순다는 것은 도덕이기 전에 산수다. 장전된 평지를 찾아, 싼 방아쇠를 꽂는 일이다.

스프링을 새로 만드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유전과 경험과 스키마로 감겨 있다. 그러나 방아쇠는 싸다. 그리고 지금 역사상 처음으로 그 방아쇠의 가격이 0에 수렴하고 있다.

AI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AI는 죽은 평지를 살려내는 마법이 아니다.하지만 장전된 평지를 찾아내고, 방향을 주고, 문턱을 넘기는 방아쇠가 될 수 있다.

끓기 직전의 평지는 지방에도, 인도에도, 중국에도, 이름 없는 방에도 앉아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안 끓는 물”이라고 부를 것이다.

일은 거기서 갈린다.

안 끓는 물로 볼 것인가.99도의 물로 볼 것인가.

그리고 99도에서 손을 뗄 것인가.끝까지 볼 것인가.

이 글은 브런치 · 2026년 6월 1일에 처음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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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 Lee의 청사진
Founder, MAEUM.io · 기술과 마음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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