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말
"너 그러다 번아웃 온다. 좀 쉬어." |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말 "너 그러다 번아웃 온다. 좀 쉬어." 한동안 이 말이 고마운 것도 같았다. 누군가 나를 걱정해주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결국 이 말이 상당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말은 아무 비용이 들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걸지 않는다. 시간도, 주의도, 개입할 각오도. 그저 걱정하는 모양새만 취하고, 문제 전체를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한 말
"너 그러다 번아웃 온다. 좀 쉬어."
한동안 이 말이 고마운 것도 같았다.
누군가 나를 걱정해주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결국 이 말이 상당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말은 아무 비용이 들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걸지 않는다.
시간도, 주의도, 개입할 각오도.
그저 걱정하는 모양새만 취하고,
문제 전체를 다시 나에게 곱게 돌려준다.
겉은 배려인데 속은 회피다.
위로의 형식을 빌린 손 떼기다.
게다가 이 말에는 은근한 판단이 깔려 있다.
'넌 네 한계를 모른다. 무모하다.'
말하는 사람은 나보다 한 뼘 위,
더 현명한 자리에 선다.
나는 자기를 돌볼 줄 모르는 사람이 되고,
상대는 그걸 일깨워주는 사람이 된다.
걱정의 문법을 쓰지만,
실은 은근한 위계의 문법이다.
진짜 좋은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은 비싸다.
자기 시간과 주의를,
경우에 따라 실제 노동을 걸어야 하는 말이다.
그 비용이 이 말을 진짜로 만든다.
그리고 이 말은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넌 네가 뭘 하는지 안다를 전제하고,
그냥 옆에 서준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대신 곁에 나란히.
물론 상대가 정말로 자기가 무너지는 걸 못 볼 때는 "쉬어"가 맞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그때조차 차이는
말의 내용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
개입할 각오를 하고 하는 말이냐,
대화를 끝내려고 던지는 말이냐.
결국 이건 책임의 문제다.
"쉬어"라고 말하고 돌아서는 사람은
그 순간을 일회성 회피로 대한 것이다.
한 번 배려한 척하고 빠지면 그만인 판.
반면 "도울 게 있을까"라고 묻는 사람은 지속적인 협업 의사를 밝히고 있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함께 있을 사람의 말투다.
그래서 나는 이 두 문장으로 사람을 구분하게 됐다.
누가 나와 진짜 같은 판에 서 있는지는,
위로의 온도가 아니라 위로의 비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싼 위로는 거절이다. 다만 리본을 달았을 뿐이다.
(.. ㅎㅎ 근데 내일이라도 좀 쉬긴 해야할듯 하다.)